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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현명함의 기초다

지금,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by 폰스키어 2023. 2. 3.

몸과 마음은 하나이므로 어떤 목적을 가지냐에 따라 전체의 나로서 움직인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마음과 몸을 일원화하여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전체로 본다.  즉 정신과 신체를 나누거나, 이성과 감정을 분리하거나,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어 생각하는 등의 이원론적 사고를 거부한다. 이는 마음과 몸이, 이성과 감정이, 의식과 무의식이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나서 타인에게 소리를 지른다면, 그것은 전체로서의 나가 소리 지르는 것을 선택한 것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감정에 치우쳤다는 말은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본다. 감정이라는 독립된 개체가 내 의향과 관계없이 악을 썼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자기수용은 긍정적 포기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전체의 나로 용기를 가지고 변화하기 위해선, 불만을 가진 현상유지가 아닌 변화와 함께 불안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자기수용을 해야한다. 이것은 자기긍정이 아니다. 우리는 '나'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릇을 버릴 수도, 교환할 수도 없다. 주어진 '나'를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용도로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 때 자기긍정을 하며 "나는 할 수 있다","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삶의 방식으로 우월 콤플렉스에 빠져 허우적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해야한다.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60점 짜리 자신에게 "이번에는 운이 나빴던 것 뿐이야. 진정한 나는 100점 짜리야."라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 자기긍정이라면 60점 짜리 자신을 그대로 60점으로 받아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라고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수용이다. 즉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교환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 나자신에게 거짓을 얘기하지 않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내는 것이 자기수용이다. 이러한 수용과정을 우리는 '긍정적 포기를 한다'라고 정의한다. 

 

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타인과 신뢰를 기반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는 상대방의 행위와 관계없이 조건 없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배신당할 수 있다.'라는 불안을 가져온다. 하지만 우리는 배신하는 것은 나의 과제가 아니라 타인의 과제라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단지 나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을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관점은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만약 그런 깊은 관계에서 정말로 신뢰가 깨지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럴 때 나는 단칼에 끊어내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과정에서 슬픔이나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다. 그 감정이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내가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해야 한다. 고통이나 슬픔을 피하려고 하지 말자. 피하는 선택은 결국 운신의 폭이 좁아져서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의 깊은 관계를 맺는 목표를 달성하며 생기는 고단함, 고통, 슬픔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감정을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일의 일 따위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목표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인생의 고매한 목표가 없어도 괜찮을걸까. 

개인심리학에선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라고 얘기한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이 전체의 과정이면서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고 있다. 여기서 진지하게 사는 것과 심각하게 사는 것을 착각해선 안된다. 

 

  인생의 최대 거짓말은 과거를 보고 인생 전제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미래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라. 당신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인생의 거짓말에 기대지 않고 찰나를 진지하게 살아갈 용기가 당신에게 있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나에겐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 여기서 필요한 용기는 엄청난 용기와 자신감, 자존감의 양이 아니다. 마치 0이 아닌 1~10과 같은 용기일 뿐이다. 

 

한 사람의 힘은 크다 정확히 내 힘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_아들러

 

특별해지려고 하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

  인간은 우월성 추구라는 보편적인 욕구, 향상되길 바라고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아이들은 첫 단계부터 특별히 잘한다. 구체적으로 부모의 지시를 잘 따르고 사회성 있게 행동하고 공부와 운동을 열심히 하고 학원도 부지런히 다닌다. 하지만 이에 맞는 결과를 가지지 못할 때 특별히 못되게 굴거나 큰 상심에 괴로워하는 감정을 품는다. 하지만 특별히 잘하든 특별히 못되게 굴든 결국 목적은 같다. 남에게 주목받고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어떤 분야든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내려면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특별히 못되게 굴거나, 문제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건전한 노력을 외면한 채 나자신과 남에게 주목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안이한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프리미어 리그의 최정상 선수가 되는 등의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해질 용기이다. 특별히 잘하는 상태가 실패로 돌아가면 극단적으로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보통인 것, 평범한 것을 선택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다면 이는 평범해지는 것과 무능해지는 것을 동일하게 여기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범함은 무능함이 아니다. 단지 나의 목적에서 어떤 특정 분야에 대해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을 구분하고,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으며 공헌이 아닌 타인이 바라는 결과의 완성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 즉 자신이 주어진 것을 활용할 때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지 않는 긍정적 포기이자 자기수용이다. 이는 결국 그 누구와도 수평적인 관계를 맺고 나의 목적을 위해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는 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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